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 웬리 암살사건 (문단 편집) == 제국군의 반응 == 우주력 800년 6월 6일. 19시 10분, 은하제국군은 이제르론 요새에서 전 우주를 상대로 발송되는 통신문을 수신하였다. 이 사실은 19시 25분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에게 전달되었다. 모든 제국군이 충격에 휩싸였지만 황제 라인하르트의 충격은 그 격을 달리했다. 황제는 "짐의 허락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인가! 말도 안되는 소리다! 그를 쓰러트리는 건 짐이어야 했다!"며 크게 분개했지만, 곧 마음을 다잡고 양과 안면이 있던 [[나이트하르트 뮐러]] 상급대장을 대표로 한 조문단을 이제르론 요새로 파견하였다. 양 웬리의 죽음을 접한 제국군 간부들을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누구는 양 웬리가 죽음을 가장하고 살아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고, 누구는 양 웬리가 죽음을 가장하고 숨어 있다고 확신했다. 거대한 적수를 잃은 제국군 간부들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특히 비텐펠트는 양이 승리를 얻고 도망쳤다 생각해 기함 [[쾨니히스티거(은하영웅전설)|쾨니히스티거]] 함교를 돌아다녔고 부하들은 사령관이 폭발하지 않게 주의를 기울였다. 양 웬리의 죽음도 죽음이지만 그 다음 사령관으로 오른 [[율리안 민츠]]에 제국군 간부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미터마이어 원수는 정보참모들에게 율리안이 누군지 물었지만 그들도 잘 몰랐고, 결국 데이터를 검색한 뒤에야 양 웬리의 피보호자였으며 18세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걸 들은 미터마이어는 솔직하게 "그래? 그거 안됐군. 앞으로 고생이 많겠어."라고 동정했다. 제국군 내부에는 누가 후계자가 되던 양 웬리 이상의 일은 하지 못할 테니, 민주주의 마지막 보루도 내부에서 무너질 것이라고 전망하는 목소리가 퍼져갔다. 그러자 제국군 장병들은 상실감을 벗어던지고 환희에 빠졌다. 카이저 라인하르트를 떠나 고향을 떠난지 최소 1개월, 간다르바에 주둔했던 슈타인메츠 함대는 1년 넘게 가족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장병들이 있었던 만큼 제국군 사이에는 [[향수병]]이 강해지고 있었다. 6월 7일, 카이저 라인하르트는 공식적으로 원정 중지를 발표했다. 뮐러가 조문간 사이 미터마이어는 함대의 대열을 정비하고 로이엔탈은 부상병 후송을 서둘렀다. 6월 12일 뮐러 상급대장은 [[올라우]] 소장, [[라첼]] 대령 등을 대동하며 기함 파르치팔을 타고 이제르론 요새로 왔다. 뮐러는 정치 지도자 프레데리카와 군사지도자 율리안을 접견했으며, 죽은 양 웬리의 유체와도 대면했다. 뮐러는 돌아가기 전에 율리안에게 카이저께 평화나 승복을 청한다면 전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율리안은 만약 카이저가 죽는다면 당신들은 깃발을 바꿀 수 있겠냐고 완곡히 거절했다. 율리안은 뮐러에게 이탈자들에게 하이네센에 도착할 때까지 항로를 확보해 달라고 요청했고 뮐러는 수락했다. 뮐러가 복귀하자 제국군은 질서정연하게 철군했다. 6월 20일, 로이엔탈 원수는 정식으로 노이에란트 총독에 임명되었으며 장병 520만 명이 구동맹령에 잔류했다. 카이저는 하이네센을 거치지 않고 동맹령을 횡단하여 7월 1일 [[페잔(은하영웅전설)|페잔]]으로 돌아왔다. 7월 7일 고급 호텔 발트인더스에서 파렌하이트, 슈타인메츠, 질버베르히 세 공신의 국장이 치러졌다. 장례위원장은 오베르슈타인이 맡았으며, 미터마이어 원수 휘하 고급장교들이 참석했다. 한편 구 동맹령에 잔류한 로이엔탈 총독은 독립정부 이탈자들을 받아들이는 한편 양 웬리의 추모행사를 열고 그를 칭송하여 구 동맹 시민들이 양 웬리를 버린 자들을 비난할 것을 노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